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고통을 회피해야 할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고통을, 성장으로 향하는 구원으로 보아야 하는가.

무엇이 되었든, 고통은 필연이며, 우리는 이것과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


우선 나는 통증과 고통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았다.

부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현대 신경과학에서도 수용되는 사실로, 중상을 입었다 하더라도 통증이 없으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또한 내 개인적 경험상, 오랜 기간 특정 부위의 지속적인 통증에 시달릴 경우 그것에 익숙해져, 통증은 여전해도 정신적인 스트레스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고통이란 관념의 산물이며 인식의 구조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인식을 전환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추론에 이르게 되었다.


스토아 철학의 에픽테토스는 고통을 감각이 아닌 판단, 해석, 기대, 의지의 작용으로 보았고,

마음의 훈련을 통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교에서는 말한다. 통증에 대한 저항이나 두려움, 의미 부여가 사라질 때 고통도 사라진다는 점은 ‘수용’과 ‘무집착’의 경지라 볼 수 있다.

마치 선안의 공안과 같다.


현대 심리치료에서도 이와 비슷한 통찰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를 수용전념치료(ACT)라 부른다.

이 치료는 통증을 없애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고통을 제거하려는 시도 자체가 고통을 강화한다는 역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경험과 여러 통찰을 통해 고통이 그저 관념일 수 있으며 그것을 재구성함으로써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 뒤따라오는 문제를 마주했다.


첫째, 고통이 관념이라 하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뿌리 깊게 내릴 수 있다는 점.

둘째, 인식이 고통을 만들지만, 동시에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우리를 견디게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성장’의 단초가 된다. 고통이 없으면 성장의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재구성하여 해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고통이 관념을 통해 해석되는 존재라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고통이 환영이라 하더라도, 그 환영이 불러오는 눈물은 실재일 수 있다.

그렇기에 고통을 지우기보다는,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씌우는 것이 고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고통이 그저 관념일 뿐이라면— 에서 연장된 생각


고통이 그저 관념에 불과하다면 그 연장선 위에 있는 기쁨, 분노, 절망, 희망, 환희 등 모든 감정 또한 결국 관념의 산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통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결국 모든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 되고, 이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설령 내가 기쁨이나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감정은 허상이라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감정을 조율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 해도 그것은 오히려 생명의 풍요를 잃고 기계처럼 무감각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길은 아닐까.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자유를 열어주는 듯 보이지만, 그 자각이 곧 자기 연출의 감옥이 된다면 그 누구도 진실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위장된 삶일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살아 있는 기계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진실하게 느끼고 살아내는 법을 세우는 일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행복하게 보이는 삶'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우러나는 행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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